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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훈 중위, 한계를 넘어 특전사로!마음을 나누며 이웃에게로!
 
김준석기자
늘상 반복되는 훈련과 꽉 차인 일과 시간의 업무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군인이 모든 국민을 상대로 수여하는 봉사상 시상에서, 그것도 대상을 수상했다면 쉽사리 믿을 수 있을까. 

▲ 정영훈 중위, 한계를 넘어 특전사로!마음을 나누며 이웃에게로!     ©박대위 말뚝3년차

▲ 정영훈 중위, 한계를 넘어  ©박대위 말뚝3년차
주인공은 육군특수전사령부 흑표부대에 근무하는 정영훈(3사 43기) 중위.
 
그는 지난 12월 5일 (사)한국교육문화원이 주최하고 교육과학기술부와 보건복지가족부가 후원하는 2009 제8회 대한민국 공로봉사상 시상식에서 ‘사회봉사부문 대상(국회 국방위원장상)’을 수상했다.

대한민국 공로봉사상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 정신과 인간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헌신한 개인과 단체에 수여하는 상으로, 이번 시상에서 정 중위는 현역 군인으로는 유일하게 대상을 받았다.

 
병사로 군생활을 하다가 직업군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 전역 후 재입대하여 그 꿈을 이루고,
앞으로도 꿈을 향하여 달릴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본다.
 
Q. 군인의 신분으로 시간을 쪼개어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A. 사실 30년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봉사활동을 하신 분도 있고, 이런 분들이 상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상을 받은 것이 부끄럽다. 많은 사람들이 군인에게 있어 휴가 기간은 금쪽같은 시간이라고 하는데,     심사위원들이 이런 점을 감안하여 나를 주목해 주신 것 같다. 더욱 열심히 하라는 채찍이라고 생각한다.
 
Q. 병사로 군생활을 한 뒤 다시 장교로 입대한 경력이 특이한데.


A. 중학생 시절 ROTC로 대학을 다니던 친척 형의 모습을 보며 막연하게 군인의 꿈을 키우기 시작하였고,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공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파일럿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종사가 되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시력 기준을 통과하여야 하는데, 나의 시력이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입시가 닥쳐올 즈음 뒤늦게 알게 되었다. 갑자기 직업군인의 길을 걷는 것에 대한 의미를 잃었고, 심한 방황을 겪으며 수능시험 준비에도 지장을 받았다. 
  시쳇말로 고3 1년을 미쳐서 놀다시피 했다. 대학 진학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전혀 부담을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 수능시험을 봤는데, 공부를 안 한 것 치고는 의외로 성적이 잘 나온 거다. 이에 부모님의 설득으로 재수를 하여 육군사관학교 입시를 준비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런데 설날에 어머니의 약을 사 드리러 약국에 다녀오며 심하게 뛰다가 발목을 다쳐, 인대가 파열되어 6개월 동안이나 입원을 하였다.
     장기간의 입원이 예상되어 입시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에, 결국 재수를 포기하고 원래의 수능 성적으로 한 2년제 대학에 입학하였다. 막상 가보니 대학 생활이 성에 차지 않았고, 내내 놀다시피 하다가 2003년 6월 군악대 병사로 입대하였다.

Q. 그렇다면 병사로서 체험한 군생활이 직업군인의 길을 걷게 한 동기가 된 것인가.

A.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렇다. 병사로서 군생활을 하며 군이라는 조직의 특성과 장교, 부사관의 역할에 대한 이해를 갖추게 되었고, 상병 진급을 하고 나서 ‘직업군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병사인 당시의 신분으로도 바로 지원을 할 수 있는 부사관 모집에, 지원할 것인지, 4년제 대학 졸업 학위를 취득하여 장교에 도전할 것인지를 고민하던 중, 당시 내가 속한 부대의 방효복 사단장(당시 소장,  육군참모차장, 국방대학교 총장 역임, 중장 예편)님이 보여 주신 ‘지휘관으로서의 따뜻한 카리스마’에 감명을 받았다. 

    그러던 중 군악병으로 행사 지원을 나가며 3사관학교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사단장님과 같은 장교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3사관학교 지원을 결심하였다. 병사로서의 군생활을 마친 뒤 원래 다니던 대학의 남은 한 학기를 이수하였고, 마침내 3사관학교에 입교할 수 있었다. 

▲ 정영훈 중위, 한계를 넘어 특전사로!마음을 나누며 이웃에게로!     ©박대위 말뚝3년차

Q. 직업군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였을 때 주변의 반응은 어떠하였나.

A. 군악병 생활을 할 때 군악대장님이 대원들에게 각자의 꿈을 말해 보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나의 발표 내용이 ‘직업군인으로 재입대하여 장군이 되고, 궁극적으로 대장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직업군인이 되려면 최소한의 신체적 건강을 갖추어야 하는데, 나의 경우 다섯 살 때 공사장 모랫더미에서 두꺼비집을 만들며 놀다.
     덤프트럭에 깔려 허리를 다쳐 이 부위가 좋지 않은데다가, 앞서 말했던 발목 부상으로 장기간 입원을 한 적까지 있어 솔직히 유리한 신체 조건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살아오며 죽을 뻔한 사고를 많이 당했다.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대원들이 고된 훈련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며 이를 말렸고, 집안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신체적 조건 때문에 나의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고, 병장 만기전역을 한 뒤 하루에 열 시간씩 운동을 했다. 한여름에 눈물이 나올 정도로, 정말 이를 악물고 운동을 하였다.

Q. 그런 과정을 거쳐 입교한 만큼 3사관학교에 대한 애정도 많을 것 같다. 3사관학교 출신 장교의 강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A. 이야기한 그대로다. 3사관학교는 일반 대학을 거친 사람들이 오는 곳이기 때문에, 사회와 군의 교육 제도를 모두 체험하고 직업군인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사관학교 동기 중에는 병사는 물론 부사관 복무 경험까지 가진 사람도 있다. 이렇듯 장교뿐 아닌 병사와 부사관 등 서로 다른 역할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춘 생도가 있다는 것 또한 3사관학교의 강점이다.

Q. 현재의 병과(정보)를 택한 계기는.

A. 미래 군의 발전 양상을 볼 때 어떠한 병과를 선택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비전이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지금의 병과를 택하였다. 
   사실 3사관학교에서의 전공이 행정학이어서, 정보 병과에 지원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끝까지 이를 고집하던 중, 병과에 미달이 발생하여 결국 원하는 특기를 배정받을 수 있었다.

Q. 특전인의 길을 택한 데에 어떤 이유가 있나.

A. 군인이라면 누구든 ‘강한 것’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의 결정체가 특전사라고 생각한다. 특전인이 되어 군인다운 군인이 되고 싶었다. 
    이렇게 특전사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정보 병과의 장교는 특전사에 스스로 지원을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임관 뒤 육군 보병 소대장으로 1년을 복무하고, 정보학교 교육에 입과하여 이를 수료하였는데 이 무렵 육군본부에서 전화가 왔다.
     나를 포함하여 함께 교육을 받은 33명의 인원 중 네 명이 특전사로 가야 하는데, 지원 의사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보병 병과였더라면 당연히 특전사에 지원하려고 했던 나에게 말할 것도 없는 좋은 기회였고, 기꺼이 수락을 하였다.
 
    사관학교에서의 전공으로 정보 병과를 선택할 수 없었는데 원하는 특기를 배정받았고, 정보 병과로 특전사에 지원할 수 없었는데 특전인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그토록 원하던 정보 병과와 특전인의 길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게 생각하며, 임관 3년차인 지금 정말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지만, 내가 선택한 길이며 또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후회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지금도 가끔씩 주위에서 ‘할만하냐?’는 질문을 받곤 하는데, 언제나 ‘즐겁고 재미있다’고 대답한다.

▲ 정영훈 중위     © 박대위 말뚝3년차
Q. 건강상의 문제로 군생활이 힘들지는 않았는지.

A. 말했다시피 장교에 지원하겠다고 하였을 때 사고의 후유증 등 건강상의 이유로 주위에서 재입대하는 것을 말렸던 것이 사실이다.
 
병사로 복무할 때에도 자대 배치를 받은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았던 이병 시절, 청소를 하다가 계단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던 허리의 후유증이 도져서 일 년 넘게 고생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이 병사 전역 뒤 운동을 시작하게 한 계기가 되었고, 3사관학교 생활을 하면서부터는 오히려 건강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 허리 MRI를 찍어 보면, 모르기는 몰라도 예전보다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처음에는 부담감이 있기도 하였고 특전사가 보병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때보다 힘들지만, 팀원들과 뛰어다니고 운동을 하며 즐거움과 재미를 느꼈다.

 
주위의 도움으로 결국 그러한 문제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


지금의 생활을 단순히 요약하면, 한 마디로 ‘재미있고 즐겁다’는 것이다.

Q. 다시 봉사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 수상 소식이 이미 많은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지만,
    어떻게 봉사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기사는 없는 것 같다.


A. 봉사 활동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모님을 따라 찾아뵙곤 했던 한 할머니의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 있다. 
    자녀가 있지만 왕래가 없어 혼자 지내시는 분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체격이 정말 왜소하셨고, 항상 집이 깜깜하며 겨울에는 밖인지 안인지 모르게 방이 추웠다. 
    정부 보조금을 받아 생활을 하시는데, 전기료와 난방비를 아끼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텔레비전마저도 켜지 않으셨다.
     그런 할머니께서 어머니와 내가 찾아뵐 때면 친손자를 맞아들이는 것 같이 나를 안아 주시며, 전등을 켜고 난방을 하셨다.

    냉장고에 반찬을 넣어 드릴 때에는 눈물을 글썽거리기도 하셨다. 천주교 신자이셨는데 방 안의 성모 마리아상에 아침마다 나와 동생을 위해 기도를 한다고 하셨다. 댁을 나설 때에는 문 밖으로 나와 눈물을 글썽이곤 하셨는데, 나에게 있어 정말 친할머니 같은 분이었다.
     이때의 기억이 봉사 활동을 결심한 계기가 되어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인천 미추홀봉사단에서 봉사 활동을 시작하였다. 
    돌아가신 현재 안타깝게도 그 분의 성함을 알지 못하지만, 당시의 기억이 주는 느낌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바로 ‘따뜻함’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봉사활동을 할 때에는 그 할머니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곤 한다.
기자 註 -

 
정영훈 중위는 봉사 활동을 시작한 뒤 고교 시절까지 매월 두세 차례 보육원과 양로원, 병원 등을 찾았고, 3사관학교 생도 시절에는 외박을 나올 때마다 지체부자유 아동의 체육 활동과 스트레칭, 학습을 도움과 함께 매월 받는 품위유지비를 쪼개어 소년소녀 가장 돕기에 기부하였다. 생도 4학년 때에는 동계 휴가 기간 중 태안 기름 유출 사고 현장에서 일주일간 자원 봉사 활동을 하였다. 임관한 후에도 생도 시절보다 액수를 높여 매월 기부를 하고 있다.


Q. 지금은 어떤 봉사 활동을 하고 있나.

A. 딱히 정해 놓고 하는 것은 아닌데 주로 지체부자유 아동의 교육을 도우며, 보육원과 노인 요양원을 찾기도 한다. 
    예전에는 휴가를 나와 주로 서울과 본가가 있는 인천에서 봉사 활동을 하는 방식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음성 꽃동네에서는 위수 지역을 지키면서도 주말마다 자원 봉사를 하는 것이 가능했고, 이를 떠올리고 나서 바로 실천에 옮겼다. 찾아보기만 하면 어디에든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었다.

Q. 군생활을 하며 느끼는 애환이 있나.

A. 아직 나이가 젊고 미혼이다 보니 별다른 것은 없다. 군대를 가리켜 일반 사회의 축소판이라고도 하듯 사회와 큰 차이는 없는 것이다. 
    다만 계급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조직의 특성상 사안의 해결 방식이 다소 다를 뿐이다.  굳이 한 가지를 말한다면 여자친구가 없다는 것이 아쉽다(웃음). 
    올해 28세이고 차츰 결혼을 생각할 시기가 되다 보니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할지를 고민한다. 임관 뒤 연애를 한 적도 있지만, 상대편이 군생활을 하는 나를 힘들어해서 헤어졌다.
 
    주위에서 ‘너는 오랫동안 군생활을 할 것인 만큼 더욱 신중해야 한다. 너의 직업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말을 해주는데, 나도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배우자가 있는 선배들을 볼 때에는 ‘어떻게 저토록 좋은 분을 만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개인적으로 ‘인연’이라는 단어를 가장 소중히 여기는데, 나에게도 그러한 인연이 있을 것이라고 본다. 지금으로서는 그냥 느긋하게 생각하고 있다(웃음).

Q. 군인이 되고 싶어 하는 예비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A. 해 주고 싶은 말이 정말 많이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명감 없이 군인이라는 직업을 수행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혹시라도 단순히 멋진 제복이 좋아 직업군인을 꿈꾼다면 다시 생각하라는 말을 하고 싶다. 일단 책임감이 있고 군생활을 제대로 해 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도전하라. 앞에서 건강 이야기를 했지만, 한 때 누워서 자는 것조차 힘들었던 내가 현재 특전사의 길을 걷고 있는 만큼 나의 경우를 참고하고서라도 정말 끝의 끝까지 노력하여 직업군인의 꿈을 이루길 바란다. ‘동경의 대상’이라기보다, ‘저런 사람도 군인이 되었는데 나라고 못할까’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Q. 앞으로의 포부는.

A. 사람마다 꿈과 목표는 다를 것이다. 병사 때 나의 꿈은 ‘군인답게 살다가 군인답게 죽어’ 국립묘지에 묻혀 후손들에게 ‘군인답게 살다가 군인답게 돌아가신 분’으로 기억되는 삶을 사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장교로 임관한 지금 하나 더 설정한 목표는, ‘대장(大將)’이 되는 것이다. 목표는 높게 설정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 정영훈 중위, 한계를 넘어 특전사로!마음을 나누며 이웃에게로!     © 박대위 말뚝3년차

이따금 ‘피부가 정말 좋네’라는 말을 듣는다는 정영훈 중위. 말을 듣고 보니 그의 피부는 정말 직업군인이 맞을까 싶게, 이른바 ‘꽃미남’이 되고 싶어 하는 남자들의 시기를 살 정도로 뽀얀 빛깔을 띠고 있었다. 옆에서 사진 촬영을 하시던 김 기자님까지 ‘어머, 그러고 보니 피부 정말 좋으시네요!’라는 말을 하시는 것을 보면 정말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웃음).

하지만 정영훈 중위는 피부가 좋다는 말보다 ‘너는 뼛속까지 군인이구나’라는 말을 느낄 때 가장 큰 기쁨을 느낀단다. 그런 모습을 보니 그는 정말 천상 군인인 것 같다.
 
인터뷰를 하며 알게 된 것이지만, 정영훈 중위와 기자는 서로 동갑내기였다. 취재를 마치고 ‘사회에서 만났더라면 정말 친구였겠다’라고 새삼 반가운 인사를 주고받으며, 기자는 ‘동갑내기’인 정 중위가 살아온 삶을 자신의 모습에 투영해 보았다.


철없이 뛰놀던 초등학교 4학년 시절, 나이가 같은 다른 한 사람이 독거노인의 집을 찾아 봉사 활동을 하기로 결심하였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취재 활동을 하고 직업군인들의 삶을 기사로 담으면서, 기자는 한 명의 직업군인을 인터뷰할 때마다 한층 성숙해져 가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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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03/04 [00:09]  최종편집: ⓒ 문화예술TV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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